시각장애인 사하라사막마라톤 250km도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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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 사하라사막마라톤 250km도전기

관리자 0 16750
첫 번째 프롤로그,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찾아”

실명 후 23년, 내 정신의 지평은 무한대로 확장되었다. 알껍데기를 깨고 나온 나는 이제 창공을 날 수 있는 날개를 지녔다.

그 날개는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사하라 사막 250㎞. 나는 사막에서 스스로 몸을 불살라서 환생하는 불사조 피닉스처럼 날아 갈 것이다.

굉음, 섬광…. 푸르디푸른 스물두 살 내게 떨어진 핵폭탄이었다. 눈부신 태양, 푸른 하늘, 초록 윤기가 빛나는 나무, 저마다의 색깔로 피어나는 꽃,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내 시야에서 지워졌다.

1982년 7월 20일, 군번을 부여받고 군인이 된 지 한 달, 신병훈련을 마치고 일주일 전 자대 배치를 받고 온 대한민국 육군 졸병 이등병이었다.

계속되던 무더위를 누르고 폭우가 쏟아졌다.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이 쏟아져 내린 집중호우였다.

“...”

섬광과 굉음이 동시에 일면서 찰나의 순간,
뜨겁고 예리한 쇠꼬챙이가 내 두 눈을 찌르는 심한 통증을 느꼈다.

빛과 영원히 결별하는 순간이었다. 빛, 그 아름다움이 내게서 사라졌다.

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수류탄에 의한 양안 파편창’이라는 병명을 달고 여섯 달 동안 치료를 받은 후 통합병원에서 제대를 했다.

제대, 앞으로 내 생이 다하는 날까지 이어질 암흑 속으로의 출발이었다.

2005년 9월, 나는 지금 이집트의 카이로에 와 있다. 카이로에서 최고급인 모벤픽 파크호텔 로비가 붐비고 있다. 23개 나라에서 온, 일상의 궤도에서 이탈한 비정상적인 사람들 때문이다.

그 중에서 나, 송경태는 비정상의 극점에 서 있다.

여기 모인 107명의 목표는 오직 하나. 사하라 사막 250㎞를 불볕을 등에 지고 달리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달리는 게 아니라 3000달러라는 큰돈을 지불하고 지표 온도 50℃가 넘는 불모의 땅 사막을 달리기 위해서 왔으니 이들을 정상이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중에서도 나, 송경태는 정신과 온몸의 세포가 무모함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6박7일 동안 하루 평균 40㎞이상을 달려야 하는 레이스였다.

데드 레이스, 곧 죽음의 레이스에 도전한 것이다. 그런 레이스에 참가하기 위해 한 치 앞도 전혀 볼 수 없는 1급 시각장애인인 내가 지금 이집트의 카이로에 와 있는 것이다.

2005년 ‘레이싱 더 플래닛’에서 주최하는 ‘북아프리카 이집트 사하라 사막 마라톤’은 최악의 조건으로 꼽히는 코스였다.

그것도 신체 기능이 정상적인 사람에 한해서다. 앞을 보지 못하면서 달린다는 것은 다른 모든 불리함을 제쳐두고 우선 체력소모가 월등히 높을 수밖에 없다.

지난 23년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행동해 보았기에 그것을 뼈저리게 체험한 터이다.

제대를 하고 집에 왔을 때 이웃집 할머니가 혀를 끌끌 차면서 ‘평생을 해주는 밥이나 먹고 방안에 갇혀 살아야 할 팔자구나’라고 하는 말을 들었을 때 마음마저 캄캄해졌다.

그렇다고 살아 있는 목숨이 해주는 밥이나 먹고 꼼짝하지 않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집안에서 일상의 필요 때문에 움직일 때 정신과 육체의 힘겨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의 정신적 공황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육체의 움직임에 따른 힘겨움은 여전히 그대로다.

1999년, 2002년 월드컵 개최 홍보를 위해 미 대륙 횡단을 할 때였다. 뉴저지 필라델피아에 있는 서재필 기념관을 출발해 로스앤젤레스까지 4000㎞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8년 동안 내 눈이 되어준 안내견 찬미와 함께 첫발을 내디딘 후 석 달 동안 걸으면서 앞만 볼 수 있다면 한 걸음 내딛을 때 세 걸음을 걸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뼈저리게 했었다.

사막에서의 레이스는 체력이 무엇보다 우선순위의 조건이다. 물론 평지에서의 장거리 레이스라고 다를 바 없다. 나는 다른 주자들에 비해 체력의 30%는 이미 소모하고 레이스를 하게 될 것이다.

거기다 사막의 지형에 적응해야 하는 체력 외적인 불리함마저 있다. 그런데도 왜 죽음의 레이스라 일컫는 ‘북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마라톤’에 참가하기 위해 이곳 이집트에까지 왔을까?

실명을 한 후 터득한 게 있다면 보이지 않는 저 너머에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점이다. 만약 가시거리 내에서 모든 걸 볼 수 있었다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 프롤로그, “ 불사조 피닉스처럼 사막 날아갈 것”

1m 앞에 무엇이 있는 줄도 모를뿐더러 또 절실히 필요한 게 있다 하더라도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상태에서 찾아서 확인해야 했다.

내 생활 속에서 그러한 일들이 거듭되고 또 세월이 흐르면서 그 의미와 가치가 정신 속으로 확장되었다.

나는 그러한 생각과 함께 마음의 안정을 찾기까지 실명 그 자체보다 더한 고통을 겪었다. 육체의 한 부분의 기능이 손상된 것보다 더한 생명, 그 자체를 포기하려 했으니까.

집 근처 저수지에 투신하기도 했고 그 밖에도 여러 차례 죽음에 이르는 길을 찾기도 했다. 미수에 그친 나의 행동은 가족들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 주었고 이웃으로 소문은 무성하게 번져나갔다.

어느 날, 근처 성당의 신부가 나를 찾아와 ‘자살’이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워보라고 했다. 내가 비록 자살을 시도하긴 했지만 명색이 성직자인 신부가 죽으려는 놈한테 자살이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데 신부가 가고 나서 혼자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자살이라는 말을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자살, 자살, 자살, 자살자살자살자살자…살자살자살자…. 나도 모르게 자살로 시작된 말이 살자로 바뀌었다.

실명 후 어둠 속에 갇혀 있으면서 절망을 전제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하고 탄식만 했을 뿐 한 번도 긍정을 전제로 ‘어떻게든 살아보자’ 하고 다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작은 계기가 내 마음의 변곡점이 되었다. 이러한 내게 정신의 나래를 펼 수 있게 해준 사람은 죽마고우 최낙관이었다.

“자넨 지금 알 속에서 부화를 앞둔 새와 같은 존재야. 스스로
껍데기를 깨고 나와야지 그 누구도 밖에서 껍데기를 깨어주지 않아.”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있는 알껍데기 깨기 비유였다.

그렇다! 지금 나를 에워싸고 있는 어둠을 그 누구도 걷어 줄 수 없는 일. 어둠을 헤치고 나올 수 있는 힘은 오직 내게만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이후 자살에서 살자로, 내 힘으로 껍데기를 깨고 나오는 새가 되기로 결심했다. 마음을 바꾸고 나니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로 내 삶이 바뀌었다.

나는 내 힘으로 알껍데기를 깨고 나온 새가 되어 창공을 날기
위한 시도를 끊임없이 하고 있다.

99년 석 달에 걸쳐 미 대륙 횡단을 마치고 이듬해 2000년에 ‘남북 민족통일 염원 백두에서 한라까지’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백두산과 한라산 등반을 했다.

2001년에는 시각장애인으로서는 감히 꿈꿀 수 없는 큰 모험에 도전했다. 캐나다의 로키산맥 스쿼미시 치프봉 거벽 등반이었다. 607m에 이르는 거대한 수직 암벽을 2박3일에 걸쳐 오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2002년에는 목포에서 임진각까지 518㎞ 국토 도보 종단을 했다. 그 외에도 산악 마라톤을 비롯, 여러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완주를 했다.

나는 두 눈을 잃기 전까지는 어떤 한계 속에서 살았다. 두 눈으로 보이는 가시거리의 한계가 은연중에 내 정신의 한계선이 되었을 것이다.

실명을 한 뒤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암흑이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아니 넘을 수도, 뚫고 나갈 수도 없는 거대한 벽 그 자체였다.

‘자살’에서 ‘살자’로 마음을 고쳐먹고 내 힘으로 알껍데기를 깨고 나왔을 때 암흑은 벽이 아니었다. 암흑은 한계가 없는 무한이었다.

실명 후 23년, 내 정신의 지평은 무한대로 확장되었다. 알껍데기를 깨고 나온 나는 이제 창공을 날 수 있는 날개를 지녔다. 그 날개는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사하라 사막 250㎞. 나는 사막에서 스스로 몸을 불살라서 환생하는 불사조 피닉스처럼 날아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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